제비뽑기의 역사, 고대 아테네부터 국민참여재판까지
2026년 10월 27일 · 제비 편집팀
국어사전에서 제비를 찾아보면 새 이름 말고 또 하나의 뜻이 나옵니다. 여럿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게 해서 승부나 차례를 정하는 방법, 또는 그때 쓰는 종이나 나무 조각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제비뽑기라는 말이 바로 이 뜻입니다. 쪽지에 표시를 해서 섞어 두고 하나씩 집게 하는 단순한 방법이지만,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방법으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을 정해 왔습니다.
민주주의는 추첨으로 시작했다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고대 아테네에서는 공직자의 상당수를 선거가 아니라 추첨으로 뽑았습니다. 시민이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서, 특정 가문이나 부자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운에 맡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기지만,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추첨이 더 민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선거는 말 잘하고 유명한 사람에게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에는 추첨을 위한 기계도 있었습니다. 클레로테리온이라고 불리는 이 돌판에는 가로세로로 작은 홈이 촘촘히 파여 있어서, 시민들이 자기 이름이 새겨진 신분패를 꽂았습니다. 옆에 붙은 관에 흰 공과 검은 공을 섞어 넣고 하나씩 떨어뜨려, 흰 공이 나오면 그 줄에 꽂힌 사람들이 배심원으로 뽑히고 검은 공이 나오면 그 줄은 탈락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누가 어느 줄에 꽂힐지, 어떤 색 공이 나올지 미리 알 수 없게 만든 장치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아테네인의 국가체제』에 그 사용법이 기록되어 있고, 실제 돌판 조각이 아테네 아고라에서 발굴되어 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신의 뜻을 묻는 방법
옛사람들에게 제비뽑기는 사람의 뜻이 끼어들 수 없는 방법이었고, 그래서 신의 뜻을 묻는 방법으로도 쓰였습니다. 성경의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배신한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람을 정할 때, 후보 두 사람을 세우고 기도한 뒤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열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도 땅을 나누거나 일을 맡길 사람을 정할 때 제비를 뽑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사람이 결정하면 누군가는 불만을 품고 결정한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비가 정한 결과는 누구의 탓도 아니니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수천 년 전 사람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대로 섞지 않으면 생기는 일
추첨이 공정하려면 무엇보다 잘 섞여야 합니다. 이 단순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큰 논란이 된 사건이 있습니다. 1969년 12월 1일, 베트남 전쟁 중이던 미국은 징병 순서를 생일로 정하는 추첨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했습니다. 1년 366일의 날짜를 적은 쪽지를 캡슐에 넣어 큰 유리 통에 담고 하나씩 꺼내, 먼저 뽑힌 생일의 남성부터 징집 대상이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 뽑힌 날짜는 9월 14일이었습니다.
추첨이 끝난 뒤 결과를 분석한 통계학자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연말에 태어난 사람들이 앞 번호를 받은 경우가 눈에 띄게 많았던 것입니다. 캡슐을 1월부터 12월까지 달마다 차례로 통에 넣었는데, 충분히 섞지 않아 나중에 넣은 12월 캡슐이 위쪽에 몰려 먼저 뽑혔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생일 달에 따라 징집될 가능성이 달라졌고, 이 일을 계기로 이듬해 추첨부터는 날짜와 순번을 각각 무작위로 섞은 두 개의 통에서 뽑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추첨이 공정하다는 것은 뽑는 순간만이 아니라 섞는 과정까지 공정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입니다.
오늘날에도 제비는 뽑힌다
제비뽑기는 지금도 중요한 곳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참여재판에서는 법원이 관할 지역에 사는 만 20세 이상 국민 가운데 무작위로 배심원 후보자를 뽑습니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 누구나 재판에 참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으로, 아테네의 추첨과 같은 생각에서 나온 제도입니다. 아파트 청약에서도 일부 물량은 가점이 아니라 추첨으로 당첨자를 정하고, 공공 임대주택이나 유치원 입학처럼 원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추첨이 쓰입니다.
학교와 일상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실 자리 바꾸기, 체육대회 대진표, 송년회 경품, 점심 메뉴까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제비를 뽑습니다. 방법은 쪽지에서 공으로,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바뀌었지만, 아무도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고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원칙은 그대로입니다.
아테네의 추첨은 얼마나 넓게 쓰였을까
아테네에서 추첨으로 뽑은 자리는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매년 오백 명으로 이루어진 평의회 의원을 각 부족에서 추첨으로 뽑았고, 수백 명 규모의 시민 배심원단도 재판이 열리는 날 아침에 추첨으로 구성했습니다. 행정을 맡는 관리들 상당수도 추첨으로 정했습니다. 반대로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이나 재정을 다루는 일부 자리는 선거로 뽑았는데, 전문성이 필요한 자리까지 운에 맡길 수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추첨과 선거를 일의 성격에 따라 나누어 쓴 셈입니다.
재판 당일 아침에 배심원을 추첨으로 정한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누가 어느 재판을 맡을지 미리 알 수 없으니, 재판 당사자가 배심원을 미리 매수하기 어려웠습니다. 클레로테리온 같은 기계가 필요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짧은 시간 안에, 누구도 조작할 수 없게 나누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공정한 추첨에서 강조하는 원칙, 즉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어야 하고 과정을 모두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이미 그때 장치로 구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네치아의 복잡한 선거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베네치아는 최고 지도자인 도제를 뽑을 때 추첨과 투표를 여러 번 번갈아 거치는 아주 복잡한 절차를 썼습니다. 대평의회 의원 가운데 추첨으로 일부를 뽑고, 그들이 투표로 다른 사람들을 뽑고, 다시 그중 일부를 추첨으로 줄이는 과정을 열 번 가까이 되풀이한 뒤 마지막에 선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만든 이유는 특정 가문이 미리 표를 모아 결과를 좌우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 누가 뽑힐지 알 수 없으니 매수나 담합이 어려웠습니다. 추첨이 권력의 독점을 막는 장치로 쓰였다는 점에서 아테네와 같은 생각을 이어받은 셈입니다.
운동 경기와 추첨
스포츠에서도 추첨은 오래전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축구 경기를 시작하기 전 동전을 던져 공격 방향이나 선축을 정하는 것은 이제 너무 익숙한 장면입니다. 월드컵 같은 큰 대회의 조 추첨은 전 세계에 생중계될 만큼 큰 행사가 되었고, 공을 하나씩 꺼내 국가 이름을 확인하는 장면은 대회 시작 전 가장 긴장되는 순간으로 꼽힙니다. 같은 대륙 팀이 한 조에 몰리지 않도록 조건을 걸고, 그 조건 안에서 무작위로 뽑는 방식은 앞에서 이야기한 교실 자리 배치나 모둠 편성과 원리가 같습니다.
프로 스포츠의 신인 선수 지명에서도 추첨이 쓰입니다. 미국 프로농구에서는 성적이 낮은 팀일수록 높은 확률을 받는 추첨으로 상위 지명권 순서를 정하는데, 꼴찌 팀이 일부러 경기를 지는 일을 막기 위해 확률을 조정해 온 역사가 있습니다. 순서대로 주면 고의 패배가 생기고, 완전히 무작위로 주면 약한 팀이 계속 약해지니, 그 사이에서 가중치를 둔 추첨이라는 해법을 찾은 것입니다.
한국 생활 속 추첨
우리 생활에도 추첨은 곳곳에 있습니다. 학교 배정에서 지원자가 정원보다 많은 경우 추첨으로 배정하는 지역이 있고, 공공 체육 시설이나 캠핑장, 인기 공연의 예매처럼 원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추첨이 쓰입니다. 선거 투표용지에 정당이나 후보의 순서를 정할 때 같은 조건의 후보끼리는 추첨으로 순서를 정하기도 합니다. 결과가 중요할수록, 그리고 누가 정하든 뒷말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일수록 사람들은 제비를 찾습니다. 제비뽑기가 수천 년 동안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결국 같은 기회를 나누는 가장 단순하고 믿을 만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비를 뽑는 여러 가지 방법
같은 제비뽑기라도 나라와 시대에 따라 도구가 다양했습니다. 길이가 다른 막대나 지푸라기를 손에 쥐고 끝만 보이게 내밀어 짧은 것을 뽑은 사람이 걸리는 방법은 여러 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쓰였습니다. 영어에서 운 나쁘게 걸린 사람을 “짧은 지푸라기를 뽑았다”고 표현하는 것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대나무 조각에 글을 새겨 통에 넣고 흔들어 하나가 튀어나오게 하는 방식이 점을 치는 데 쓰였고, 지금도 절이나 사당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쪽지를 접어 모자나 상자에 넣고 뽑는 방식이 가장 흔했고, 아이들 놀이에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엎어라 뒤집어라”나 가위바위보가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도구는 달라도 누구도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게 한다는 원리는 모두 같습니다.
좋은 제비의 조건
수천 년의 역사가 알려 주는 좋은 제비의 조건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모든 후보가 같은 확률을 가져야 하고, 누구도 결과를 미리 알거나 조작할 수 없어야 하며, 그 과정을 모두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클레로테리온이 돌판과 공으로 해냈던 일을 오늘날에는 컴퓨터의 난수가 대신합니다. 제비의 모든 도구는 암호용 난수를 써서 뽑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화면에 과정을 그대로 보여 주어 모두가 함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제비뽑기의 제비는 새 이름과 관련이 있나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새 이름 제비와 뽑기 도구 제비가 서로 다른 낱말로 올라 있습니다. 소리가 같을 뿐 뜻은 따로입니다.
클레로테리온은 지금도 볼 수 있나요?
아테네 아고라에서 발굴된 클레로테리온 조각이 아고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969년 징병 추첨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요?
이듬해 추첨부터는 생일이 적힌 캡슐과 순번이 적힌 캡슐을 각각 다른 통에 넣고 따로 섞어 하나씩 짝지어 뽑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섞는 과정의 치우침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컴퓨터로 뽑는 추첨은 믿을 수 있나요?
암호용 난수 생성기를 쓰는 도구라면 결과를 예측하거나 조작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제비의 모든 도구는 브라우저의 암호용 난수를 써서 뽑습니다.
제비뽑기와 가위바위보는 어떻게 다른가요?
가위바위보는 상대의 선택을 읽는 심리가 끼어들 수 있지만, 제비뽑기는 누구도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정성이 중요한 자리에서는 제비뽑기가 더 많이 쓰입니다.